교회사적의의 |
한국 천주교회의 박해는 1791년부터 시작되어 1879년 드게트(Deguette)신부가 중국으로 추방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은 순교자의 탄생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 실제로는 교회 창설 이듬 해인 1785년에 박해가 시작되어 한불수호통상 조약이 체결되는 1886년까지 약 1세기 간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오랜 박해로 12,000~13,000명에 이르는 순교자를 탄생시키게 되었으며 한국 천주교회가 1866년 병인박해 이전의 교세를 회복하게 된 것은 실제적으로 한불조약 체결 후 5년여 뒤의 일이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를 먹고 자라났다'고 할 정도로 박해를 받으면서 성장해 왔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복음은 단절되지 않고 꾸준히 이어져 왔으며, 한국 순교 전통과 신자들의 순교 신심은 박해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었다. 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순교 사적지, 오랜 시복 시성 운동을 통해 1984년에 이루어진 103위 성인 시성식도 박해의 결과로 얻게 된 신앙의 유산이다. |
비고 |
<참고>
브뤼기에르 주교-Brugiere, Barthelemy(1792~1835) 파리 외방전교회원. 초대 조선교구장. 주교. 한국성은 소(蘇). 1792년 2월 12일 프랑스의 레사크(Reissac) 지방에서 태어나, 카르카손(Carcassone) 신학교에 들어가, 1815년 12월 1일에 신품을 받고, 모교에서 10년간 신학과 철학을 가르쳤다. 1825년 33세의 나이로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갔으며, 이듬해에 태국으로 건너가, 그 곳 신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중 1829년 5월에 보좌주교로 선정되었다. 바로 이 때에 자발적으로 창설된 조선 교회로부터 성직자 파견을 요청받은 로마 교황청은, 파리 외방전교회와 논의하는 가운데, 제254대 교황으로 즉위한 그레고리오(Gregorius) 16세가 1831년 9월 9일에 두 가지 교서(敎書)를 통해, 조선 교회를 북경교구로부터 분리하여 새로이 독립된 대목구(代牧區)를 창설하는 한편, 초대 감목으로, 조선 전교를 자청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하였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창설 46년만에 북경교구에서 독립되어 고유한 조직을 갖춘 교구로 발전하게 되었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교황청의 이러한 결정을 알게 된 것은 1832년 7월 25일 이후의 일이었는데, 그는 1831년에 이미 조선입국을 위한 장도에 올라 마카오에 와 있었다. 1832년 10월 21일 교황청의 사령장을 받은 그는 조속한 조선입국을 위해 중국으로 들어가 갖은 고난과 질병을 극복하면서 중국대륙을 횡단하여 서만자(西灣子)까지 다다랐다. 그리하여 10월 19일에는 오늘의 열하성(熱河省)의 뻬리쿠( 溝)라는 교우촌에 도착하였으나 20일에 갑자기 뇌일혈을 일으켜, 조선땅을 눈앞에 바라보며 선종하였으며, 그 때 주교의 나이 43세였다. 조선을 향하여 페낭을 떠난 지 4년간, 복음을 전하겠다는 희망으로, 온갖 고난을 극복한 불요불굴의 굳은 신념의 소유자였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학문과 덕행이 높은 이상적인 성직자였다. 그의 개척한 길을 따라 곧 모방(Mau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 등이 조선입국에 성공함으로써 조선교회는 드디어 모든 조직을 갖춘 완전 독립된 교회로 성장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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