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적의의 |
조선 교구는 1831년 9월 9일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왕국에 설정된 교구를 의미한다. 정확한 명칭은 조선대목구(代牧區)이나 편의상 조선 교구라 부르고 있다. 1660년 중국 남경(南京)에 교구가 설정되면서 조선지역은 남경교구에 포함되었다. 그 후 조선지역은 1792년 북경 교구 구베아(Gouvea) 주교의 개인적인 보호와 지도에 맡겨졌고, 이러한 위임은 구베아 주교의 후계자들에게도 계승되어 조선 교회가 북경교구에 속한 것이나 다를바 없게 되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일부 학자들이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기 시작한 후, 주어사?천진암(走魚寺, 天眞菴)에 모여 강학(講學)을 하는 동안 천주교 신앙에 대한 싹이 텄다. 그래서 1784년에 이벽(李檗)의 권유로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 들어가 세례를 받고 귀국한 다음, 그들은 `천주교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 신앙공동체의 출현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을 찾게 된다. 초기의 신도들은 스스로 신앙을 찾고 구했으며 실천했다는 점에서 세계 교회사상 유례가 없는 자율적인 교회 창설의 전통을 남겼다. 또한 한국 교회를 가톨릭 교회 본연의 교회로 승화시키기 위하여 열성적으로 성직자 영입(迎入)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795년에는 한국 교회의 사목 책임자(司牧責任者)인 북경주교가 보낸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맞아들였다. 그러나 주문모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순교하자, 조선 교회는 다시 목자 없는 교회로 돌아갔다. 이에 제2차 성직자 영입운동을 벌이게 되었는데 청원(請願)은 당연히 조선 교회의 사목책임자인 북경주교가 대상이 되었으나 자율적 활동으로 신앙을 구하고 교회를 창설한 전통을 가진 신자들이기에 마침내 가톨릭의 수위권자(首位權者)인 교황에게 직접 청원하는 적극적인 대책을 세웠다. 조선 교회가 창설된 후, 조선의 신도들에 의해 제기된 조선 교회와 로마 교황과의 연계 발상(連繫發想)은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에 처음으로 나타나 있다. 그 뒤 1811년 권(權)기인 등 8명의 평신도 지도자들은 조선 교회의 재건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로마 교황청에 주교의 파견을 요청함으로써 교구설정을 위한 노력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었다. 이에 이어 교황이 조선교구의 설정을 결심케 한 것은 1825년에 쇄국의 조선왕국에서 발송한 정하상(丁夏祥)과 유진길(柳進吉)등의 간절한 청원서였다. 이 청원은 조선 교회를 위한 성직자 파견만이 아니라, 조선 교회에 대한 영속적 교정(敎政)대책의 강구를 요청하였다. 조선교구의 설정에는 북경주교의 호의가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사목 책임자로서 그는 깊은 이해와 후원으로 로마교황에게 조선 교인들이 직소(直訴)하는 청원을 오해 없이 수긍하고 이를 교황에 전달하는 데에 적극 협력하였다. 조선 교회의 청원은 1827년 포교성성(布敎聖省)에 접수되고 교황에게 상정되었는데 교황과 포교성성 장관인 카펠라리(Cappellari)추기경은 성심을 다하여 조선 교회의 대책을 서둘렀다.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에 조선 선교의 중책을 맡아 주도록 거듭 교섭하였다. 조선 교회를 위하여 더 다행한 일은 파리 외방선교회의 브뤼기에르 신부가 1829년 멀리 방콕에서 조선전도를 지원하고 나선 일이고, 1830년에는 조선 교회를 위해 적극 힘써 준 카펠라리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임되어 그레고리오 16세로 즉위한 것이다. 그래서 조선교구의 설정을 위한 노력을 마침내 결실을 맺고 `사도로부터 이어온 사도전승의 교회'의 제도가 조선에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1831년 조선교구가 독립교구로 설정된 이후 그 역할과 업적, 그리고 희생은 엄청나게 컸다. 그러나 조선 교회의 끈질긴 저력은 초기 교회에서 평신도들이 자율적으로 교회를 일으키고 지켰던 연면한 전통에 그 바탕이 있었다. 모진 박해와 시련 속에 자라온 조선교구는 1911년에 서울교구로 개칭되었으며 전라도와 경상도지방을 대구(大邱)교구로 분리시켜 주었다. |